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
시인 다윗은 스스로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와 하나님, 누가 당신의 장막과 당신의 거룩한 언덕, 곧 시온에서 당신과 함께 거할 수가 있습니까?” 즉, “누가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제가 요 근래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와 어떤 철학가들 조차도 자신들이 믿는 신들과 자신들이 추구 했던 최고의 철학적 대상과의 관계를 가장 신성시하고 중요시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의 계시에 기초한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창조되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살았던 그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안에 심어 놓으신 종교의 본질 때문에 그러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로 지어진 존재요,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아 생명을 얻은 존재이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의 본질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마치 갓난 아이가 열달 동안 어머니의 태 안에 거한다거나 그 속에서 나아와 어머니의 품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은 가장 안락하고, 거의 완전한 행복 안에 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 다윗은 인간의 가장 커다란 행복과 영광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구 했던 행복과 얼마나 다릅니까?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옳은 것을 깨닫고 또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인간이 그대로 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전쟁의 과정을 통해서 그야말로 황금 만능과 육체적인 미를 추구하는 정신문명의 타락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정신의 성숙을 강조했던 소크라테스 에게 독배를 마시도록 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의 증언과 인류의 경험은 인간이 옳고 좋은 일을 생각하면 그것을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을 오직 인간 스스로, 그리고 인간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나름대로 의미는 있지만,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했고 그것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행복을 누릴 사람
그런데, 놀랍게도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 세상의 한 복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공동체적, 혹은 개인적인 구체적 관계 안으로 집어 넣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 입니다.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 입니다.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 입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 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그의 눈으로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사람 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는 사람 입니다.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변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는 사람 입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덧붙이기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 성경은 놀라운 균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나누는 영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의 참된 행복은 이 세상의 다양한 장소에서, 보이는 인간과의 다양한 관계의 올바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셔서 우리 개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과 우리 각자가 마주하는 각 개인과의 관계가 도덕적으로 성숙해 지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는 공동체를 떠나서 가정과 직업생활과 다양한 사회생활의 한 복판에서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늘 다윗이 열거하는 이러한 종류의 삶의 방향으로 향하고, 또한 이러한 종류의 삶의 열매를 맺으려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더 충만한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나오는 거룩한 언덕 위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최고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는 신앙과 삶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의 무대가 됩니다. 그것이 참 종교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 임재 하셔서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복들을 나누어 주실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임재의 거룩한 불꽃 안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의 연료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또 다시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과 과제가 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윗이 말하는 종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에게 순환론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기독교의 신비하고 참된 진리의 빛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그야말로 ‘거룩한 선순환’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런 것이겠죠.
☛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와 묵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 그는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 하지만, 때때로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심지어 영적인 무기력함이나 도덕적인 타락을 경험 하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로 진실하게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따릅니다 ➠ 어느 날, 깊은 기도와 묵상 속에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갑니다 ➠ 이전에 실천할 수 없었던 매우 수준높은 도덕적인 실천과 열매를 맛봅니다 ➠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더 충만한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의 도덕법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그것을 복음의 능력 안에서 해설해 주셨던, 그러한 종류의 도덕적인 실천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