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15,16/하나님을 사랑하는 삶(3)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 설교의 개요
이번 주일 메세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시리즈의 세 번째 설교로서, ‘안목의 정욕’이 무엇이며, 그것에 빠지지 않으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2. 설교의 요지
본문의 논지를 역으로 표현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안목의 정욕’에 빠지게 되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안목의 정욕에 빠져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그가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잠시 놔두고 우리 다 함께 가장 오래 전,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 에게로 잠시 가보겠습니다. 창세기 본문을 직접 인용할 필요도 없이 함께 창세기 3장에 있는 한 장면만 떠올려 보겠습니다.
어느 날, 사탄의 화신인 뱀의 유혹에 말려든 하와는 그 날따라 금단의 열매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위기의 때에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고백 했던 이 말을 오늘 우리의 본문과 연결시켰습니다. 즉 ‘먹음직’ 한 것을 ‘육신의 정욕과, ‘보암직’ 한 것을 '안목의 정욕과, 그리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는 것을 ‘이생의 자랑’과 연결시켜서 이 세 가지의 정체를 밝혀 나갔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안목의 정욕
어떤 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바로, 하와가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보면서 ‘보암직’ 했다고 하면서 선악과를 따목도록 했던 그것이 ‘안목의 정욕’을 이해하는 탁월한 실마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잘 번역한 ‘보암직하다’를 좀 더 직역해 보자면, 하와가 뱀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선악과를 보았을 때, 그것이 하와의 눈에 즐거움과 심지어 환희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정욕이 되어서 사탄의 말에 쉽게 유혹되어서 그것을 먹는 실천력을 얻게 되었고, 그것을 아담ㅠ에게도 주어서 먹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욕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실천의 능력입니다.
(2) 안목의 정욕을 이기는 길
그러면 우리와 같이 ‘성도’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신분과 영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안목의 정욕을 극복해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강한 영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심각하게 병들도록 하는 이 세상의 가장 대표적인 금단의 열매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사도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요,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따먹게 되면 하나님이 사랑이 그러한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도록 하는 ‘안목의 정욕’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비중있게 받아야만 합니다.
둘째로, 청교도 경건의 신학적이고 경험적인 유산과 함께 제 개인의 영적인 여정 속에서 정리된 매우 중요한 요소를 계속해서 여러분과 공유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 말씀드렸던 안목의 정욕이 일어나서 그것이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실천력을 얻는 것과 동일한 원리가 그것을 이기도록 하는 원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겁니다.
그것이 어떤 것을 보는 것으로 일어나는 성적인 욕망이든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한 탐닉이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것들에 의해서 유혹을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기억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행위와 과정을 우리는 ‘묵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왓슨 목사님은 묵상을 정의하면서 ‘영혼이 조용히 물러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이 솟아나게 하는 행위’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진실한 묵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속에서 ‘안목의 정욕’과는 정 반대에 있는 ‘거룩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그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은 우리에게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라고 하는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도록 하는 경건의 능력, 곧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놀라운 실천력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결의 결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한 강한 결단과 실천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묵상의 마지막 열매입니다.
3. 실천적 적용
(1) 이 세상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도록 하는 수 많은 재료와 에너지들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것들을 법적인 정당성을 얻도록 하고 문화적인 옷을 입혀서 누리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열매가 ‘동성애’와 관련된 법과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문화적인 프레임 작업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인 명령과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지혜와 경건의 능력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 지 지난 주 설교를 묵상하며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2)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세상에 편승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의 삶과 현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서 멀어지도록,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각자 돌아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고귀함과 행복을 다시한 번 묵상해 봅시다.
(3) 왓슨 목사님의 조언대로 깨달은 진리가 묵상되지 않으면, 그것은 마음에 작용을 일으킬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에너지원으로 사용 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이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최선을 다해 말씀을 되새기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교제하는 묵상의 실천을 성실히 행합시다.
**묵상의 본질에 대한 이 문구를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두 세번 반복해서 읽고 그 의미를 자신의 방법으로 해석하고 이해해 봅니다. "영혼이 조용히 물러나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속에 거룩한 감정이 솟아나게 하는 활동이다(토마스 왓슨)."
**수요일은 오전 6:00부터 기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토요일은 6시부터 '묵상의 이론과 실제' 에 대한 말씀 후에 6시 20분 부터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은 기도를 마치고, 편안하게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 묵상가이드
1. 우선, 기도하는 시간과 습관을 가지도록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합니다.
2. 기도할 때, 급하게 자신의 필요를 아뢰는 것부터 하지 말고, 주일 메세지와 천로역정의 내용을 가지고, 혹은 각자가 읽었던 성경의 말씀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언어로 되뇌이고 자신의 귀에 들리도록 자신의 언어로 말해봅니다.
3.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구별된 장소와 시간속에서 실천하는 경건한 묵상은 빈번하게 다음과 같은 은혜로운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는 그 과정 속에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에 은혜로운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affection, 정동).
(2)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에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관심이나 어려움들을 터치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녹아내리게 하시며, 참된 회개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3)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자유함을 누리게 되고 어느 때에는 간절함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혹은 타인이나 자신을 위해서 진정한 간구를 올릴 수 있게되며,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